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과 악을 넘어서 中 , '경구와 막간극 146'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 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


-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에필로그」-


2.

 감정은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편견이다. 감정은 우리의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긍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유로운 감정의 소유자와 당당한 인격을 무서워하는 법이다. 그건 그들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좋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라!

나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선택하고, 반대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하라!


-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에필로그」-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지마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이 따르는 용기를 내는것.

이미 당신의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다." - 스티븐 잡스 -


3.

 오만(Superbia)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코 굴욕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굴욕으로 생각했던 어떤 남자의 오만은 이처럼 비극적인

과장을 낳게 되었다. 그렇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버려야만 하는 것이 바로 오만이다.

그것이 어떤 식의 오만이든지 간에 말이다.

 "너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이 없어." 오만한 사람의 내면을 이만큼 분명히 보여 주는 표어도 없을 것이다.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전지전능하다는 자신감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래서 오만은 항상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전지전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만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죽기 쉽고, 암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추락사하기 쉽다.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암벽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암벽을,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변하는 자동차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암벽의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또 애인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당할 수 밖에.


 겸손(Humilitas)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 뜻대로'가 바로 사랑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항상

자신의 무기력을 토로할 수 밖에 없다. 나의 구애를 받아줄지 거부할지가 전적으로 상대방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는 자각이야 말로, 드디어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다.

 별로 돈이 안되는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삶에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무능력함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없는지를 정확히 알게된다.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것. 다시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 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후회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가능하다.

한마디로 타자가 자기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후회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것이다.


 겁남(Pusilanimitas)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강한 자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약자는 생각을 많이 한다.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된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니 더 강한 욕망의 대상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매혹적인 대상과의 우연한 마주침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바깥으로 자주 나가야만 한다. 




4.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가 아니다.

이루어 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한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 째 뽑아버릴 수도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더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 행복했었다." 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걸 가급적이면 다 해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평상시 원했던 근사한 차를 사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그래서 서글픈 감정이다.

그 어떤 이별보다도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아서도, 서로가 싫어서도 아닌 나약해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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